억울한 이타주의자의 착각(by. 아난)
명진은 회사에서 자타공인 고충상담원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위아래로 여러 동료들이 그를 찾아온다. 이렇게 회사에서 살아남고자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유능함을 인정받기 위해 주말과 건강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얻은 인정은 회사에서 그를 만인의 ‘비빌 언덕‘으로 만들었다. 윗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일을 모두 미뤄도 문제없는 팀원이었다. 후배들은 어차피 명진이라는 검토자가 있기에 일을 대충 해서 가져가도 된다고 안일하게 접근했다. 명진은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의 몫을 해나갈수록 퍼져나가는 미담과 인정을 동력 삼아 계속 일을 해나갔다.
배려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좀 더 무리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왔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이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명진은 ‘아니요’라고 거절하는 것이 꼭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명진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었다. 자신이 위아래로 치이고 있음과 함께 속에서 부글부글 무언가가 올라올 때마다 스스로를 추슬렀다. 일단 모두를 위해서 일을 해나가면 승진이든 좋은 평판이든 보상이 돌아올 거라 믿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명진의 갈증은 날이 갈수록 채워지지 않았다. 목마른 명진은 결국 스스로 보상책을 만들어냈다. 뒤에서 자신의 성과를 미담으로 퍼뜨리며 다른 팀원들의 무능력함을 넌지시 내비쳤다.
“서경이 때문에 망할뻔한 프로젝트 내가 다 살려냈잖아! 얘가 너무 서툴러서 내가 다 가르쳐줬어.”
팀원들의 평판이 망가질수록 자신에 대한 인정이 쌓인다고 생각했다. 명진은 어느새 사내 정치의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어떤 이슈나 소문이든 고민을 빙자하여 명진에게 수렴하고 명진에게서 퍼져나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팀장이 오자마자 명진을 낚아채듯 회의실로 부른다.
“명진 책임님. 우리 팀에 곽수석이 올해 승진대상자잖니. 점수 못준 거 이해해 주라.”
올해도 승진에서 밀리다니 명진은 허탈했다.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억울해졌다. 자리로 돌아와 평가 결과를 확인하는데 명진의 분노버튼이 눌러졌다. 명진은 팀장 평가뿐만 아니라 팀원 간 평가에서도 최저 점수를 받았다. 명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야근하던 수많은 밤이 머릿속에 지나가면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명진은 후배들을 불러냈다.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당황하여 고개 숙이고 사과할 줄 알았던 후배들이 눈을 빠른 속도로 깜빡이며 말을 쏟아냈다.
“책임님이야말로 어떻게 저희한테 이럴 수 있으세요? 잘되면 다 책임님 덕이고 안 되면 다른 팀원들 때문이라고 하고 다니는거 저희가 모를 줄 아셨죠? 그동안 진짜 억울했어요.”
“아니 뭐가 억울해? 따지고 보면 일을 해도 너희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하는 건 사실이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책임님. 근무시간에 게임하고 유튜브 보실 때 저희 진짜 허탈했어요. 맨날 담배 피우러 나가고 자리 비우면서 잘된 것만 책임님 공으로 돌리는 동안에 책임님 일 누가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세요? 저희 다 같이 팀으로서 일한 거잖아요. 책임님 혼자만 회사에서 일한 거 아니잖아요. 저 진짜 참다가 말하는 거예요.”
침묵만이 감싸다 명진은 힘없이 “알았다”하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사실 명진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후배의 말에도 여전히 명진은 자신의 억울함이 가장 컸다. 명진이 보기에 후배들의 일은 별 노력 없이도 가능해 보였고 자신의 일이 가장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근무시간에 딴짓 안 하는 사람 있냐’며 자신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냐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무엇보다도 명진은 후배들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자신의 분은 삭이고 돌아왔다. 그 순간에도 평판과 인정을 신경 쓰는 자기 자신이 지독하다 싶었고,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명진은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 연차를 무작정 내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혼자 놀고 있는 7살 배기 아들에게로 다가가니 병원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들이 의사 역할을 하겠다고 하자 명진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머리가 너무 아파요. 저는 친구들을 위해서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니래요. 어떻게 하면 좋죠?”
“친구들이 해달라고 해서 한 거 맞아?”
명진은 머리를 띵-하고 맞는 느낌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그에게 다른 사람의 몫을 대신 다 짊어지라고 한 적은 없었다. 점점 생각할수록 기억 한 구석에 외면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던 동료들. 명진의 억울함이 명진만의 억울함이었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억울함이 쌓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긴 명진을 보며 아들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장난감 주사기를 들고 와 명진의 심장에 꽂는다.
“마음이 다쳤나 보네. 주사 맞았으니까 괜찮을거야. 여기 약 가져가. “
명진은 약봉지를 받아 들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약봉지 위 ‘병명’에는 삐뚤빼뚤 서투른 한글로 ‘어구람’이 적혀있었다. 약봉지를 열자 안에는 청진기가 들어있었다.
“선생님. 여기 약이 아니라 청진기가 잘못 들어 있는데요?”
“청진기로 아빠 마음을 들어봐. 그럼 아픈 게 나을 거야. 알았지? “
명진은 아이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명진은 단 한 번도 ‘나’로서 살아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좋은 사람이 되려다 보니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마음을 마주한 적이 없음을 실감했다. 명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늘 초점을 두며 지레짐작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 것은 크게 보고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은 쉬워 보였다. 명진은 지난날 자신이 잘못한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제대로 사과해 본 적도 없었다. 자신보다 더 잘못한 사람이나 더 심각한 상황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고 ‘나 정도면 낫지’라며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빠져나왔다. 이제야 명진이 억울해져 보니 지금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서 억울함을 호소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명진은 노트를 펼쳤다. 그간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억울한 순간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글을 쏟아냈다. 명진은 그 글의 끝에 문득 자신이 어렸을 때 산 가짜 나이키 운동화가 생각났다. 친구들과 비슷한 운동화를 신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 대신 샀던 모조 운동화였다. 정품과 똑 닮은 운동화를 신고서 살면 평소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이 말썽이었다. 다 떨어진 밑창 사이로 물이 들어와 양말을 다 젖게 했다. 겉으로 보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명진은 그때부터였을까? 다 젖은 양말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감추듯, 남들과 비슷한 삶 속에 있다는 안도감으로 자신을 감추며 다른 사람의 기대감에 급급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 명진은 후련함에 젖었다. 자신이 남을 배려한다고 한 행동을 왜 상대가 원했다고 확신했을까? 왜 당연히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놓쳤던 것들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감정이든 한계선을 넘어가면 위험한 상황이 펼쳐진다. 풍선처럼 꽉 차버린 마음을 중간중간 주둥이로 바람을 빼주지 않으면 기어코 터지고야 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진은 이제부터라도 ‘나’로서 살아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적은 뒤 노트를 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