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식물처럼 나이가 들지만,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에서 늙는 것은 동물처럼 무력해지고 격리되는 것이다. 무력하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밀려 나이 많은 한 무리의 소외계층이 된다. 노인이 존경받는 시대에서 비하받는 시대로 바뀌었다. 유교가 깊이 뿌리내렸던 우리 사회는 노인 존경의 흔적이 흉터처럼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젊었을 때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생활을 하고 싶은 시기가 있다. 그런 욕구는 노인이 되어서 또 한 번 되풀이된다. 내 주위 몇몇 친구들이 따로 집을 얻어 가족과 떨어진 혼자만의 거처를 마련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물론 그런 생활이 젊을 때와 달리 많은 현실적 불편함 때문에 대개 다시 원래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더라도 독립생활로 가족으로부터 받는 부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보고 싶은 갈망은 누구나 가질 것이다.
퇴직 후 얼마 되지 않아 전철에서 함께 사회활동을 했던 젊은 여성을 우연히 만났더니 묻는다. “선생님! 퇴직하니 무엇이 좋아요?” “내일을 준비하지 않아서 좋다.”라고 답했다. 술을 마셔도 친구와 놀러 가도, 동아리 활동을 해도 언제나 내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갑갑한 삶에서 벗어났다. 남자들에게 공통되는 악몽이 있다. 제대했는데도 어느 날 꿈에 다시 입대하게 되는 꿈이다. 퇴직한 나의 악몽은 수업 준비 없이 수업하는 꿈이다. 몸이 피곤하면 가끔 그런 꿈이 꾸어진다. 이제 그 꿈에서도 벗어났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많은 것은 장애이다. 저렴하고 쾌적한 요양원이 있다는 친구의 소개를 받았다. 만덕터널 입구에 있는 황전양로원을 찾아가는 길에 휴대전화기 이용이 익숙하지 않아 지나가는 젊은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왜 늙은 것이 불쾌하게 말을 거느냐는 표정이다. 헬스장에서 있었던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스쿼시를 하는 여성의 자세가 너무 좋아서 옆에서 “자세가 참 좋습니다!” 했더니 그때도 쳐다보는 여성의 눈길이 그랬다. 승강기에서 어린이를 보고 “참 이쁘구나!”하고 칭찬하면 옆에 있는 아이 엄마는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다시는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걸지 말아야지!' 내심으로 작정했으면서도 또 그런 눈길을 받는다. 노인 혐오증이 곳곳에 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에서 맡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은 맡지 않으려는 저렴한 기피 업종 직업군으로 밀려나는 시기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농경사회였다. 아버지가 가장이라는 직책을 당연시 생각하고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알았다. 모든 생활의 중심은 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가정 최고의 어른이다. 아들보다 오히려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더 관용적이고 여유 있는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또 다른 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이제 아무 쓸모없이 밀리고 밀려 탑골공원에서 전철에서 역광장에 모여 한 끼 식사를 기대하는 초라한 존재로 바뀌었다. 퇴직한 동료가 하는 말 “퇴직하고 3년이 지나면 거지가 된다.”라고 한다. 남성 공무원으로 퇴직하여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기고 나머지가 되어버린 친구의 하소연이 그러할진대 연금이 적어 생활하기 어려운 일반 시민들에게는 노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급속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여 넘쳐나는 노인들의 수가 전철에 앉아보면 실감한다. 경로 우대증인 이 무임승차권을 전철을 이용할 때마다 고맙게 생각한다. 전철을 타면 노인석이 아닌 일반석에는 앉지 않는다. 그 자리는 우리들의 이용료까지 함께 지불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앉아야 할 자리이고 노인이 그들을 제치고 앉아 가기에는 너무 뻔뻔스럽다고 생각한다. 70이 넘으면 이제 소득과 연결되는 생활은 모두 마무리하고 오직 소비생활에만 전념하게 된다. 소득이 없으니 지출도 거의 바닥이다. 이 나이가 되면 수입도 없고 지출마저 최소화한 생활이니 관혼상제에 부조금이나 축의금을 내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고 자유스러워진다.
나와 친했던 친구와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해 왔지만 이제야 그의 모든 참모습을 알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여러 면에서 나와 비슷한 시각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였던 친구도 이때쯤이면 다른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고를 하는 친한 친구를 보면 '아니 이 친구가 그런 친구였나?' 하고 놀란다. 사회를 보는 지향점이 달라서 내가 말하면 그 친구는 분노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나와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친구를 보면 내가 참기 어려워진다. 서로 어려운 사이가 된다. 사회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눈치 보며 언성을 높일 일이 아님에도, 상대에게 분노를 표출하듯 말하게 된다. 싸우고 돌아와서 허탈해하는 그런 친구들은 이제 만날 의미가 증발하여 버린다. 시효가 끝난 것이다. 함께 어울려 사회생활을 해나갈 시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나야 할 기회가 많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정리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제 수입도 사회참여도 친화력도 모두 떨어진 상태에서 나와 가치관이 전혀 다른 친구와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싸우는 사이라면 그런 불화에도 만남을 계속해야 하는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같은 시각으로 논하며 전망해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니 친구 많음이 이제는 의미 없는 나이이다. 발이 넓어 여러 가지 문제 발생 때 대처하기에 유용한 역할을 해 주었던 친구도 생각이 확연히 다르면 서로의 간격이 멀어진다. 지금 보니 오래 사귄 친구가 좋은 친구가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친구가 좋은 친구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치기해 버리면 주변에 남는 친구가 몇 되지 않는다.
이제는 혼자서 놀아야 하는 시기이다. 살아남다 보면 점점 혼자가 되어 간다. 쓸쓸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과의 유대가 더 필요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어쨌든 혼자서 견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진 촬영을 하고 인화를 하고 또 그것을 보고 그림으로 옮기고, 평생 하지 않았던 음악도 손대어 하모니카를 불며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래주는 노래를 선택하고 연주하며 혼자된 즐거운 시간에 익숙해지려 몸부림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잊을 것을 잊고 관계도 단출하게 정리하고 복잡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어린아이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잊고 또 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 나가고 있다. “요즘은 잊음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같아!”라는 친구의 말에 “응 그래”하면서 또 하루를 보낸다. 모두에게 닥치는 일이다. 알고 미리 준비하면 훨씬 덜 괴롭고 지나가기도 쉽다. 지나와서 보면 그 꽃 같던 시절도 어제처럼 가깝다. 젊을 때 늙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멀리 느껴졌을 뿐이다. 너도나도 예외 없이 와 닥칠 늙은 어느 날을 미리 알고 대비하자. 내가 늙은이 되는 그때는 좀 즐겁자! 퇴직은 일만 하다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기이니 좋은 구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