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 @못골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면
'응, 그래 나도 그런 날이 있었지!'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살아온 만큼의 세월 속에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화려했던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하고 때로 스스로 물어본다.
화려하고 행복한 날들은 순간이고 그 순간이 만들어지는 날들은 길다. 화양연화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고 했던 시점을 지나오면서 그것이 해소되고 극복되어 극적으로 전환될 때가 아닐까? 그런데 나의 화양연화는 지나오고 나서가 아니라 지나고 있을 때 괴로운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89년 교육현장을 권력의 입맛대로 만들기 위해 노태우 정권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교사들의 생존권을 박탈하여 자존심을 뭉개 버리려고 했다. 1,500여 명의 교사를 파면시켜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된 폭풍 같은 해였다. 순치를 거부하는 교사들이 막강한 국가 권력을 대상으로 한 간 큰 싸움이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었다. 나는 힘들게 학교로 들어가 이제 적응을 할 만하니 해직되었다. 그런 제자를 보고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안쓰러웠는지 다른 학교로 다시 임용되도록 몹시도 힘써 주셨다. 국가 권력과의 싸움이라 임용이 될 수 없는 데도 허망한 희망을 걸고 애써 주신 선생님이 고맙기만 하다. ‘할 테면 해보아라!’라며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면 무서움이 없어진다. 학생들과 함께 최루탄이 난무하는 자욱한 연기 속에서 튀고 쫓아가고 던지고 하는 격렬한 순간, 삶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을 사진으로 잡아 볼 수 있었다. 그냥 현장에 남아있으면 단순했을 나의 삶이 해직으로 하여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복형사들로 둘러싸인 대학 강당에서 “지금은 교육 독립운동 중이다”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연설문이 준비되지 않아도 그냥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요약하여 진술하면 생생한 연설이 되었다.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연설이었다.
94년 거리의 교사에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신규임용의 형태로 복직이 결정되었다. 굴욕적인 복직이라며 몇몇 동료는 복직신청을 거부하고 계속 투쟁의 장 속에 남았다.
소개도 없이 스며드는 연기처럼 슬그머니 복직되었다. 관리자는 새로 전근해 오는 교사가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의 기회마저 박탈해 버렸다. 아예 직원들이나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 했다. 하지만 주변 동료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 지금 학교에 임용되어 오는 직원이 어떤 처지에 놓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괜히 딴지를 거는 사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 접근을 피하는 사람들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내 앞에서 얼른거렸다.
해직 기간에 겪은 많은 경험으로 학교에 처음 임용될 때 갖고 있던 부정적인 면들은 모두 털어 버린 새로운 나였다. 오직 수업에만 전념하려 애썼다. 고등학교에서는 맡지 않던 과목을 중학교에서 처음 맡았다. 무엇보다도 교사의 가장 기본은 수업이다. 일과를 마친 뒤에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학교에 남아서 벽에 걸 괘도 작성이며 학습지 제작 등 수업 준비에 몰입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은 과목을 맡았던 동료 교사가 '나 때문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처음 맡는 과목이라 실력이 없어서 열심히 교재 준비를 했는데 그의 눈에는 힘든 경쟁자로 느낀 모양이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ㅎㅎㅎ.
학교 현장에는 그제야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었지만, 해직 기간에 교육선전부, 편집부 일을 하며 이미 컴퓨터에 익숙해져 있었다. 문서 만드는 일은 그냥 키보드를 두드리면 완성되었다. 동료 직원들은 보고 쓰듯이 생각을 즉시 문장으로 만들어 작성하는 것을 보고 “그~참!”하였다.
수업에 굶주려 있던 열정을 한껏 펼치니 아이들과의 유대가 밀착된다. 내가 좋아하니 아이들도 나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그냥 좋았다. 미운 놈이 없었다. 아니 말썽부리는 아이도 예뻤다. 허기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 마냥 학교생활에 적응해 갔다.
스승의 날이었다. 학급의 아이들이 다른 반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유리 창문을 커튼으로 모두 가리고 우리 반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받은 선물을 늘 다른 직원들과 나누니 학급 아이들이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아예 큰 봉투 속에 포장을 벗겨버리고 함께 모아서 나에게 주었다. 나를 싫어하던 관리자도 아이들과의 유대가 너무 밀착하자 그가 보기에도 신기한 듯 “김 선생 반 아이들은 유별나네요!” 하며 웃는다.
자퇴하려는 반 아이가 있으면 몇 번이고 가정방문을 하여 제지했다. 한 명의 탈락도 없이 졸업시키는 일을 무슨 사명처럼 생각했다.
인문계 Y고로 옮겨왔다. 아파트 가운데 있는 학교이고 학부모들의 관심도가 지나치게 높아 교사에게는 피곤한 학교라고 했다. “가서 살기 나름이다”라며 별스럽게 귀에 담지 않았다. 비로소 처음 임용된 급별인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장산 계곡에서 야외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말이 야외수업이지 한 시간 자연 속에서 시골 같은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학생들은 더없이 즐거워했다. 내 자식처럼 아이들이 좋았다. 옆에 다른 반 국어 교사가 웃으며 한 마디 한다. “20년 만에 3학년 담임을 하니 미치겠지요!” “응 그래! 좋아서 미치것다.” 고3 담임이라고 간혹 영양제나 약이 들어오면 고3 학생도 몸 건강이 중요하다고 빌미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모두 풀어 버린다. 함께 먹었다.
난 받지 못해서 주고 싶었다. 반 전체 아이들과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가면 식당에서 일정 정도 할인을 해주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식이다. 40명이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늘 대척점에 서서 긴장 관계를 갖던 관리자도 일 년이 지나고 보니 '학교 조직의 결정을 거부하고 자율로 행동할 것'이라는 처음에 가졌던 편견이 잘못되었다며 미안해했다. 물질적 이해관계나 정치성이 없는 일반 학사 행정에는 할 수 있는 한 함께하며 나를 낮추었다. 몇몇 학교를 거쳐 기장에서 정년퇴직하고 한참이 지났다.
퇴직 뒤 어곡산단 동일고무벨트 하청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현장 노동자들의 삶을 늘그막에 경험하는 것으로 소득을 바라는 현장의 삶을 정리했다. 이제는 평생 함께해 온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을 또 다르게 표현하려 배워 온 그림을 사진에 접목하려 궁리 중이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무슨 일들이 새로 일어날지.
11월이다. 곧 약속이나 한 듯 어느 날 황금빛 은행잎들이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져 세상을 환상처럼 장식할 것이다. 그때가 그들의 화양연화일까? 우리 인생도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내 인생의 화려했던 시절을 판단할 수 있다. 열심히 사는 날들 속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