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마종기(by. 못골)
걸어가다가 복도에 걸려있는 시를 우연히 읽는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이하 생략
- (마종기 '바람이 전하는 말' 중)
시에 발길이 잡혀서 '어라! 무슨 이런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시가 있지!' 하며 걸음을 멈추고 서서 끝까지 읽는다. 작은 바람에도 자신의 의지를 넣어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마음이 나에게 와서 멎는다. ‘오! 내 정서에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 작가는 시의 표현이 사후의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해석은 독자 자신이 하고 주제도 스스로 맞게 정하면 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시 해석이나 문학 감상은 너무 입시 위주의 틀에 박혀 ‘님은 누구냐?’,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은 무엇이냐?’란 질문에 우린 늘 정답을 생각해 왔다. 님도, 바람도, 당신도, 떠나는 것도 모두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부여 할 수 있는 것이다. 조국, 광복, 사랑 등등 우리가 고정적으로 생각해 내어야 했던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시의 해석을 벗어나 자유롭게 시를 감상한다.
마종기 시인을 인터넷에 탐색해 보니 아동 문학가 마해송의 아들이다. 영광도서에 들러 마종기 시인 책을 샀다. 읽으니 문장마다 표현된 그의 느낌이 전해와 나도 그가 되어 본다. 이과 출신과 문과 출신의 사고는 판이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사위 둘이 이과이고 딸들은 모두 문과이다. 그래서 가족 간에 게임을 할 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이과가 별거 있어? 대충 그래!” 하면 또 “문과는 다른가? 어디 문과 패 한번 보자!” 하는 식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마종기는 의사이면서 시인이다. 이과이면서 문과 역량을 겸비하니 완벽하겠다.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까? 자신에게 주어진 제재와 고통이 오히려 좋은 글감이 되어 자신의 정신세계를 더 풍부하게 했을 것이다. 상처받은 인간일수록 더 예민하고 감수성이 뛰어나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같은 사물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는 다의적 생각을 한다.
아버지 마해송은 1956년에 연재된 어린이 동화소설이지만, 사실은 정치풍자소설인 ‘물고기 세상’에서 이승만을 늙은 거북이에 빗대며 4, 19 혁명을 예언한 걸작 동화작가이다. 그 아들이 마종기이다. 그는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서명으로 불법 연행되어 강제 투옥, 고문 등 박정희 군사정권의 보복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게 된다. 국가 권력이 은밀하게 강제한 국외 이주자라는 조건을 생각하며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강제로 외국으로 이주하게 되어 외국에서 늘 조국을 그리워하며 시를 쓴 사람이다. 쫓겨 나가서 바라보는 조국의 의미를 섬세한 필체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그냥 눈물이 날 것 같다.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문학의 감성이 나는 좋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이루어질 수 없어도 문학으로는 가능하다. 인간인데 꿈꿔 보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삭막한가. 감방 속에 고립되어 있어도 생각의 범주, 상상의 세계는 가두지 못하기 때문에 좁고 좁은 감방 속에서 오히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분개하고, 환희하는 시들이 만들어져 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이하 생략)
- (마종기 '쓸쓸한 물' 중)
불완전하고 그래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때 모든 사물은 살아있는 것이다. 완성된 것은 이제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죽은 것이다. 그래서 쓸쓸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중간 생략)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마기 '우화의 강 1' 중)
텔레파시는 유대가 약하거나 소원한 사람들 사이보다 친하고 자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더 강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좋아하면 물길이 튼다는 말, 서로 지켜보아 준다는 말은 그런 느낌일 것이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는 듯 친밀감이 이어지는 친구는 그만큼 넉넉한 강물로 연결된 것이다. 산다는 것이 밥 먹듯 일상적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떨어진 공간에도 불구하고 유대감이 이어진다면 대단한 사이이다. 읽는 시에서 나도 같은 감정을 크게 느낄 때 행복감마저 든다. 압축되고 요약된 시는 어느 매체보다 감동을 크게 준다.
마종기의 시를 읽으며 곳곳에 줄 쳐지고 표시가 되는 것은 그곳에 그만큼 내 마음이 얹혀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시에 그대로 표현하여 나 대신 문자로 드러내 주는 고마움에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