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하는 세대 갈등(by. 못골)
나이가 들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구세대로 밀려 그 집단 속에 편성된다. 세대 갈등은 시대를 넘어 언제나 존재했던 문제이다.
진화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행위는 없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 재고 따진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모두 맞는 말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고, 쪼들리고, 다투고 하는 삶의 과정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평범한 순리였다. 여기에서 육아와 관련하여 계산하면 이상한 결과에 닿는다. 이익, 손해의 셈법은 극히 이성적이고 이기적이며 타산적이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손해가 되면 안 된다.
결혼 전, 한때 나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녀에 관한 문제까지 생각해 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아이는 낳더라도 딸아이를 낳으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왜? ‘딸아이는 결혼하여 시집가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삼 년 뒤에 딸아이를 낳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당연한 것으로 ‘그냥’ 키웠다. ‘그냥’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아이 혼자여서는 안 되겠다.’로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가 더 있어 형제는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친구로 살다가 나중 먼 훗날에 그래도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형제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둘째도 딸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아 선호 사상이 많이 남아있을 때였지만 오히려 반가웠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키워야 할 텐데'라는 생각만 하였다.
결혼 전에 크게 잘못한 생각이 두 가지가 있다. '배우자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고쳐가며 살면 되지!' 하고 나 위주로 생각한 면이다. 사람은 살아가며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잘 고쳐지지 않는 대상에 허망한 희망을 거는 잘못된 착각을 했을까? 다음으로 잘못한 생각은 '아이를 낳지 않으면 좋겠고 낳게 되면 딸아이가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딸아이로 하여 벗어나 보려는 자식에 대한 책임은 평생 뒷바라지해도 마무리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을 때와 달리 그래도 철이 조금 난 지금 나이가 들어 한번 생각해 본다. 아이가 없었다면 편하기야 했겠지! 걱정도 없고! 그렇지만 얼마나 단조롭고 삭막할까? 인생이란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편하고 부유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만으로 잘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요즘 결혼한 딸아이와 이야기하면 완전히 어긋나진다. 나의 이야기는 꼰대의 이야기로 치부되고 여러 부분에서 공격받는다. 그럴까? 자녀를 갖지 않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단정 내리기가 나도 주저된다. 우리들은 내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때가 되어서도 “그래! 아버지의 그런 말들이 있었지만, 자녀를 갖지 않으려는 나의 선택이 더 현실적이고 맞았어!” 하는 결론에 닿는다면 좋겠다!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아닐 것 같은 불안함은 어쩔 수 없는 아버지만의 노파심일까?
조선 말기 19세기 전반까지도 서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천민이었다. 그런 신분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가혹한 생활을 했다. 유교 사회의 가부장제에서 사회변화에 따라 남녀평등이나 신분 차별 등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 왔다. 이제는 아내 혼자만 하는 육아나 가사 노동 분담에 태만하거나 해야 할 가정의 역할에서 벗어나면 남성들은 옛날과는 다르게 비난을 받는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비난이 아닌 자연스러운 처신이었다. 인권이 강조되기 전에는 비정상이 정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지금도 인간 평등, 남녀 평등이 언급된다.
고려시대 노비 만적의 난에서 주장한 평등사상은 지금의 시점에서 보아도 당연한 주장인 것처럼, 천년이 지나도 그때도 지금도 옳다. 그처럼 변함없는 중요한 진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가부장적 신분사회, 선민의식에 젖어 과거의 시점에서 현재를 보는 착각 속의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한다.
그때 맞는 것이 지금은 틀릴 수가 있다. 과거에 맞다고 믿은 것을 지금에 와서 틀렸다고 하여 과거 사실이 변하지 않겠지만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언제나 고치려 노력해야 한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금의 출산문제 같은 세대 갈등도 변할 것이다.
주변의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결혼도, 출산도 모두 선택의 문제로 보고,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으로 인식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경제문제이다. 지금도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여러 자녀를 낳아서 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 주택 마련에, 과다한 사교육비에, 노후 대비에 허덕이는 우리들의 젊은 세대는 여러 갈래로 고민이 몹시 많다. 이런 어려움 속에 그 지긋지긋한 입시 경쟁 속으로 애들을 몰아넣는 일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출신 성분이 금수저인 아이들은 많아지고 개천에서 자란 아이들의 숫자는 쪼그라들어 소수로 소수로 몰린다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 공유하게 될 가치는 어떻게 될까? 나만 갖는 공연한 두려움일까?
혼자이기 때문에 늘 어른에게 친구 역할까지도 요구하는 손녀를 보면서 ‘형제가 있으면 좋은 친구가 될텐데’ 하고 생각해 본다. 자녀 출산 문제는 가장 심각하게 부딪치는 세대 갈등의 한 모서리이다. 개학일이 되어서 9살 손녀에게 물으니 “학교에 가고 싶다”라고 한다. 내 손녀와 동갑이지만 형제가 셋인 손주를 둔 친구에게 물으니 그의 손녀는 형제끼리 노는 즐거움으로 개학이 되어 “학교에 가는 것이 싫다”라고 한다.
7,80년대는 치밀한 삶의 계획이 없어도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가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것이 지금 젊은이들과 다른 우리들의 삶이고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낳으면 기르고, 길러서 결혼하여 분가해 나가면 아이들 나름대로 노력하여 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대개 그렇게 믿고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왔다. 아이를 낳고 길러 가족으로서 행복한 유대를 쌓아가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차단당하는 많은 장애로 둘러싸인 지금의 젊은이들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국가 수준이 높아질수록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악해 가는 현실에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배고픔이 해결되면서 인간다움을 상실해 가는 오늘의 현실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더 밝고 활기찬 미래를 예측하고 삶의 수준도 나아져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암담해지는 현실에 기성세대로서 종(種)에 대한 욕구마저 자제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