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은 마음에서 솟아나면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질문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깨부순다. 내게는 ‘아이를 낳을까? 말까?’가 나를 바꿔놓은 질문이다. 막연히 미래를 떠올릴 때 자식이 자리 잡고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당연한’ 가족을 벗어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의 세계로 넘어가면서 생각은 변해갔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끝없이 같은 질문으로 이어지며 답 없이 맴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낳을까? 말까?’하며 오락가락하게 한 질문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히며 놓아주지 않고 있다. 눈 딱 감고 그냥 남들처럼 낳아야 할지, 아니면 이제는 문을 닫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나는 노산이라 불리는 나이로 넘어왔다.
여러 사회적 압력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배우자는 아이가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친구들은 ’만 35세‘를 넘어감과 동시에 ’안’ 낳는 것과 ‘못’ 낳는 것은 다르다며 출산의 세계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신나게 신혼을 즐기며 딩크족이라 밝히던 이들도 ’이제는 둘이서 뻔하다’라며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 떠났고 그게 자식이었다. 회사에는 펑퍼짐한 원피스만 입고 가도 ‘혹시?‘하며 내가 언젠가 육아휴직을 들어갈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당연히 자식은 낳는 것이라며 다가왔다. 어디를 가나 육아 이야기뿐인 주변 세계로 나도 쏙 들어가 대세에 속한다는 안정감에 혹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라는 가정은 ’굳이?‘라는 말과 함께 힘을 잃어간다. 아이를 낳으면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나는 잠시 볼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키워달라고 부탁하면서까지 아이를 낳고 싶은 이유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낳을래?’라는 질문에도 막막해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시간이 많다면?’ 엄마로 사는 삶에서 도망치려는 나와 그런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여러 조건을 대가며 양몰이 하는 내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어떻게 해야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싶다. 아이를 낳은 이후의 행복을 나는 맛볼 수 없고, 낳은 이후의 고통은 체감되기 때문에 아무리 가늠하고 결정하려 해도 애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다.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커 생각이 점점 촘촘해진다. 어떤 때는 그냥 아이를 당연히 여기며 별 고민 없이 육아라는 세상에 뛰어드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라며 예민하고 걱정 많은 자신을 할퀸다. 그렇지만 이제는 삶의 우선순위에 나를 가장 위에 두고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대로 사는게 내게 꼭 맞으리란 법이 없다는 걸 알아가는 요즘이다. 한 생명을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다는 말들이 마음을 움직이지만,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엄마의 삶이 나에게도 잘 맞을지 알 수가 없다.
돌고 돌아 당도한 질문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다. 그 삶에 아이가 필요한지 아닌지로 질문을 튼다. 아이를 원하는지 아닌지는 내 삶의 목적이 아니다. 육아는 내 삶의 목적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부차적인 현상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강요가 아니라 순수하게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은 뭘까? 내가 살아내고 싶은 삶은 어느 쪽일까? 어떤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쪽이든 변화가 있는 삶을 택하고 싶다. 아이가 있는 삶을 택한다면 7세 고시와 무한 경쟁의 연속이라는 사회적 압력을 버티며 좀 다르게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오른 것이다. 아이가 없는 삶을 택한다면 엄마가 아닌 기혼 무자녀 여성의 삶을 나만의 방식으로 펼쳐나갈 것이다. 어떤 삶을 택할지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오늘도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던 무더운 여름날에는 ‘아이를 낳을까?말까?’라는 질문이 내게 불행의 씨앗이라 생각했다. 이 질문이 내 안에서 피어난 순간부터 어느 쪽을 택하든 후회하는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아이를 낳으면 낳은 대로, 낳지 않으면 낳지 않은 대로 후회하는 내가 그려졌다. 사람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껏 저 마음속 깊은 동굴까지 갔다 오고는 질문을 덮어두었다가 꺼내기를 반복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도착하여 그 답을 점점 찾아가고 있다. ‘그 삶에 아이는 필요할까?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변화하는 순간, 뿌옇기만 하던 내 미래의 삶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나의 가능성을 여러 방향으로 머릿속에서 펼쳐내며 질문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경험하고 죽을 수 없다. 무엇을 가장 경험하고 싶은 삶일지 오늘도 질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