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인줄 알았지만 별거 아니었던 순간에 대한 아버지와 두 딸의 글입니다. 2025.7.11. 스물여덟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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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한껏 나태해져 있다가(!) 4개월 만에 다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동안 땡비는 푹 휴식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잠시 멈춰 섰더라도 이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겠죠? 새로운 주제와 글로 꾸준히 찾아올게요. 오랜만에 하나의 통 글을 써낸 것에 감사하며,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큰 일인줄 알았지만 별일 아니었던 순간입니다. 편하게 읽어주시면좋겠습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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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by. 흔희)
엄마가 말했다. 인생에서 황금기는 취직하고 결혼하기 전 아가씨일 때라고. 몇 번의 고배를 마시고 원하는 직장에 안착하였다. 취직하고 나니 연애하고 싶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20대 중후반의 청춘남녀들은 곁눈질로 흘깃거리며 주변의 비슷한 또래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임용고사를 준비할 때, 내 코가 석 자였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을 서로 소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무더운 여름날. 내가 소개해 주었던 둘은 연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둘은 결혼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크고 작은 오해들로 둘의 틈은 벌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쪽이 다른 쪽에게 이별을 고했다. 인연을 맺는 것은 함께 시작하지만, 맺은 인연을 끊는 것은 당사자 간에도 시간 차가 존재한다. 한쪽은 마음을 정리했지만, 다른 한쪽은 그러질 못했다. 정리하지 못한 쪽이 원망과 서러운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고 있던 나는 몹시 곤란했다. 둘 다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한 사람만 알았다면 확실히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신나게 뒷담화를 해줄 수 있는데, 맞장구를 치자니 남은 한쪽이 마음에 걸렸다. 중립 기어를 유지하기로 했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네가 그런 나쁜 의도로 상대를 대하진 않았겠지만, 행동만 보자면 그런 오해를 받을 만했다." 휴대 전화 너머로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며칠 뒤 친구에게서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는 연락이 왔다.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연애하는 동안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하는 에피소드를 듣고 있었다. 다른 한쪽을 등지고 뒷담화에 가담하는 느낌이 몰려들었다. 그 자리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녹아 컵 주변에 물기가 송골송골 맺혔다. 5월이었지만 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허벅지 뒤쪽에 땀이 차서 속치마가 달라붙어 있었다. 치마를 떼어내면서 웃으니, 친구도 따라 웃었다. 웃음소리가 슬펐다. 막연한 생각이 설핏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이 되겠구나. 힘들게 임용을 치르고 맞이하는 첫 스승의 날인데. 그런 소중한 날을 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나보다 먼저 취직했던 그 친구가 만나자고 이야기하면서 덧붙였던 말이었다. 좋게 풀자고 만들었던 자리는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스승의 날은 매년 반복해서 찾아왔고 나는 초임 교사의 풋내를 타성으로 덮어가고 있었다. 학급에 또래와 비교하면 사회성 발달이 늦은 아이 A가 있었다. A는 자극에 민감했고 대화도 자기가 아는 지식을 나열하는 수준이라 일방적이었다. 수업 시간에 관심사가 나오면 아는 지식을 읊어댔고, 수업의 흐름은 끊어지기 일쑤였다. 학급의 아이들은 A를 잘 견뎌주었으나 기말고사를 앞두고 A에 대한 피로도는 이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피로감은 배척과 놀림, 빈정거림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주는 자극 앞에서 A는 고성과 울부짖음으로 대응했다. 수업 시간에 A의 목소리가 교실 문을 넘어 복도로 울려 퍼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빈정거림과 울부짖음이 일정한 기류를 형성하여 교실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분위기를 한 번 끊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벽면으로 옮기고 교실 중앙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원을 만들어 다 같이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쭈뼛거리며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A와 아이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자기의 힘든 부분을 털어 놓았다. 자기중심적이고 관계에서 일방적인 A에 대한 피로감이 주된 내용이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울고 화를 내는 모습이 힘들다고 했다. A에게 물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냐고. 그 행동엔 어떤 의도가 담겨있냐고. 행동 너머로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이었냐고. “제가 우기는 것도 있지만 친구들이 놀리듯이 말하고 무시하는 걸 보면 화가 났어요. 억울했어요. 그래서 소리 지르고 울었어요. 누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A의 울부짖음과 고함이 그런 마음을 잘 전달하고 있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화난다는 건 전달이 됐어요. 하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행동하니 보고 있으면 같이 화가 났어요. 그게 도와달라는 말인지는 몰랐어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진중한 편으로 평소에 말수가 적어 학급 내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학생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의견을 물었다. 생각을 가다듬는지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A가 차분하게 말해도 애들은 A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아요. 애들이 A의 말을 좀 들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실이 갑자기 숙연해졌다.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학생이 의견을 보탰다.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늘 관망하는 태도에서 한 발 빗겨서 있던 아이였다. ”A가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면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기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A가 하는 말이 맞는지, B가 하는 말이 맞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친해지고 싶은데 늘 거절당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아요. 서로 배려가 좀 부족한 것 같아요.“ 발언의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그리고 묵직하게 자기 의견을 보태준 목소리가 있었기에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다. A도, A와 자주 마찰이 있었던 아이들도 서로 노력해 보기로 했다. 이야기했다고 하루 만에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일단은 해보는 걸로. 지내다가 또 예전으로 돌아갔다 싶으면 오늘처럼 다시 모여 이야기를 해 보자고. 16살 아이들의 한 시기가 넘어간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린 것들이 있다. 그때는 세상의 전부였지만 지나고 보면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느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맞고 틀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 그때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린 경우가 많으니까. 시시비비가 중요했던 16살도 시간이 지나면 접어주는 것이, 넘겨주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이런저런 경험 속에서 아이들도 품이 커질 것이다. 넓어진 품속에서 맞고 틀리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관계에 시선을 두는 여유가 생기는 날도 올 것이다.
20대 무렵의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둘 다 아는 사이에서 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곧 뒷담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마흔이 된 나는 이제서야 안다. 그냥 들어주면 되는 거라고. 굳이 무언가를 해결하려 할 필요도 없었고 판단을 내려주려고 할 필요도 없다.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를 건넨다고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왜 나는 그토록 모질게 친구를 심판대에 올리려 했는지. 소원해진 관계 속에서 친구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 시절 나의 아집과 미성숙한 행동을 사과한 내용이었다. 초조하게 답신을 기다렸다. 몇분쯤 흘렀을까. 친구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요약하자면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문장 중에 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네가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던 거지. 그런 사람이라서 나도 더 예민하게 나를 이해해달라고 어리게 굴었던 것 같아.” 사과를 주고받았다고 몇 년간 끊겼던 관계가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이미 흘러간 사이다. 다만,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지겠지. 먼저 건넨 나의 사과가, 뒤늦게 받아준 너의 용서가 그 정도의 의미인 것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만족한다. 그때는 찬란했지만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 사이도 존재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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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울에 안 살고, 부산으로 오려고 합니까?” 면접이 끝나갈 때쯤이면, 의심 가득 찬 눈빛으로 면접관들이 늘 물어왔다. 서울에서 약 10년을 살았던 나는 면접관들에게 ‘언제든 서울로 다시 돌아갈 사람’으로 보이는 듯했다. 면접관은 “그래도 다 서울로 가더라고요.”라며 씁쓸하게 지난 채용을 들추면서까지, 내게 답변을 더 요구했다. 각서를 쓸 수도 없고, 어떻게 짧은 답변만으로 부산에 계속 살겠다고 증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수한 면접을 거쳐,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던 모범답안은 “원래 부산 사람이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요.”였다. 그럼에도 “왜 굳이 부산에?”라며 캐묻던 면접관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나타나곤 한다. 부산에 터를 다시 잡은 지 약 1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종종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이제는 제법 여유 있는 표정으로 “왜 서울이 좋아요?”라고 되묻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지만, 막상 부산에 다시 살기 시작했을 때는 큰일 났다 싶었다. 어쩌면 면접관들의 예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온 것인데도, 그사이 나는 변해 있었다. 서울 사람과 부산 사람, 그 사이 어느 경계에 서 있었다. 늘 "○○씨"하며 깍듯하지만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 서울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안 지 하루 만에 "○○야, 여기 앉아라!" 하며 훅 들어와 투박하게 챙겨주는 부산의 문화에 어질했다. 일자리에서도, 부산에 있으니 서울에서의 빠른 변화와 넘쳐나는 기회가 그리웠다. 마치 부산에 오면서 내 가능성이 닫히는 듯한 불안감이 맴돌았다. 서울에서 내가 다 삼키지도 못하던 기회와 정보들이 마치 내 것이었던 것처럼 배가 아팠다. 인간관계가 다 끊기리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이 들수록 세 사람도 모이기 힘들다는데, 친구들이 죄다 서울에 있어 잊히겠구나 싶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과한 걱정들이었다. 다들 '인서울'을 외치며 좋다고 하여 간 서울에서는 성장의 기회들로 즐거웠지만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 무언가를 성취해 갈 때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내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조금씩 천천히 알아갔다. 부산에 와서야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인간관계에서도, "거리가 멀어지면 우리도 서먹해지겠지?"라던 친구들 말에 대한 대답으로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서울로 간다. 기차 안에서 몸은 고되지만, 이어지는 인연에 감사하며 부산으로 돌아가는 걸 반복한 지도 어느새 10년이다. 우정도, 내 삶도 무탈하거늘 부산으로 와서 무엇을 그리 영영 잃을까 봐 걱정한 건지 웃음이 나온다.
오히려 부산이라서 진짜 나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언가를 계속 성취해야 할 것만 같아 등 떠밀리기보다, 부산은 한층 여유로운 도시다. 내가 필요로 하는 정도의 문화와 정보들이 간간이 온다. 압도될 듯한 인파들에 휩쓸려가지 않고, 스스로 꼭꼭 씹어서 여러 경험과 정보를 소화할 수 있다. 다들 한 방향으로 추구하는 삶을 권하더라도, 내게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다양한 저마다의 삶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는 순응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근거지를 바꾼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이 정말 닫혔을까?’라며 자신을 괴롭혔던 질문이 머리를 계속 맴돌다가 3년 전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차곡차곡 정리해 가면서 내가 직접 마주했던 다양한 경험과 사람들로 다져진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다는 걸 깨달아갔다. 내 가능성을 도시, 학교, 회사처럼 속해왔던 어느 집단의 가치에 한계를 두고 볼 필요가 없었다.
행복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곳으로 옮겨보는 것이 내겐 전환점이 되었다. 빠르고 손쉽게 내가 행복해지는 장치들이 부산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바닷바람이다. 엄마는 머리가 어지러울 때 병원보다 '해풍 앞으로!'를 외치는 사람이다. 나 역시도 시험을 망치거나 잘 안 풀리는 날이면 아버지와 바닷가로 가서 밤바람을 왕창 쐬고서 뜨끈한 돼지국밥을 먹곤 했다. 바닷바람이 어찌나 센 지, 머리칼과 뺨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내 몸속 세포 하나하나까지 뚫고 들어와 궂은 기운을 다 가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중 어느 장면이었는데 힘들 때면 그 바닷바람이 자꾸 떠올랐다. 한강으로 뛰어가 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나 홀로 바람을 만들어내며 서울의 이곳저곳을 누벼보았다. 그러나 강은 바다가 아니었다. 나를 뚫어버릴 듯 관통해 버리는 바닷바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게 당연했던 삶의 인프라는 바닷바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역세권, 편의점이 필요하듯, 있어서 당연했지만 없어져 보니 필요한 게 바닷바람이었다. 도시의 흐름을 싹둑 끊어내고 머리를 비워내게하는 바다가 나를 소소하지만 확실히 행복하게 한다. 바닷바람같이 나의 걱정을 잠재워주는 것을 내 곁에 더 다양하게 두고자, 조금이라도 흥미가 가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의미 부여를 한다. 그렇게 호기심을 꾸준히 이어 나가면서 새로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웃을 일을 더 만들고자 한다.
내년이면 부산에 다시 터를 잡은 지 어언 10년이 된다. 이제야 나는 이 도시가 주는 여유에 조금씩 안착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벼락치기가 어려운 나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안정을 찾는 데 10년이 걸렸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삶의 근거지를 바꾸며 걱정했던 것들이 큰 일인 줄 알았는데, 삶은 걱정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삶의 근거지를 바꾼다는 게 어떤 이상향을 찾아가는 게 아니다. 부산에 살면서 갑갑하고 불만인 부분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사는 도시, 환경을 바꿔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힘을 좀 빼고 내게 더 편하고 잘 맞는 환경이 뭔지 알아볼 수 있는 타이밍이 온 것이었다. 소소한 행복이 곳곳에 깃든 환경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로 주변을 꾸려가도록 더 노력해 나갈 힘을 준다.
일희일비의 널뛰기를 쉽게 하는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이번에도 큰일이 났다'며 머리를 싸맸다. 그러다 점심을 마치고 잠시 들른 포구에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새파랗게 구름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는 눈뜰 수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이 다 뭐라꼬.”라며 혼자 되뇌었다. 글을 써나가는 도중에는 큰일이었지만 다 마무리하고 보니 별일 아닌 게 되었다. 뭘 써도 마음에 들지 않던 불편함이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오늘따라 스쳐 가는 바닷바람들이 더 선명하게 품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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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 극복되는 것이다(by. 못골)
퇴직 후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나태한 생활에 젖어 버릴 것 같았다. 다음 디딜 돌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너무 조급해한다고 말했지만, 편한 생활을 경계했다. 함께 근무했던 남선생의 친구가 양산에서 중소기업인 G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장과는 몇 번의 술자리를 함께 가지면서 오래전부터 친해져 있었다. 그는 퇴직 후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퇴직하는 달인 2월이 다 지나갈 무렵인데도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결단이 필요했다. G산업의 B사장을 찾아가서 일자리 부탁을 하니 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나은 일자리를 알아보자고 했다.
G산업은 고무벨트 회사의 하청 기업으로 자동차 유리와 바디 사이의 물막음용 고무 패킹을 생산했다. 그랜저, 제네시스 등 고급 차종에서 일반 차종까지 창문에 사용되는 패킹을 여러 형태로 만들었다. 고무를 넣어 주물에 형태를 뜨고 이음새를 잇고 필요한 경우 단추도 달고, 여러 공정의 성격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꽉 짜인 일련의 작업이었다. 불필요한 동선을 줄이고 공정을 최적화하기 위해, 필요한 곳곳에 작업 도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이런 도구가 최적의 장소에 비치되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6시경 동래 충렬사 앞에서부터 B사장의 그랜저가 통근용으로 운행되었다. 부산에서 출퇴근하는 직원들과 함께 양산 공장까지 출근하였다. 근무하는 동안 B사장이 가끔 함께 점심을 하며 근무하는 데 힘든 점이 있는지 물었다.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하는 사장의 모습이 겸손해 보여 좋았다. 늘 직원들을 차별하고 갑질을 예사로 하는 관리자가 대다수인데 말이다. 약 80명의 직원 중 여성과 남성이 반반의 비율인데, 나는 잡부 겸 검사부 일을 했다. 손수레에 고무 원단을 싣고 공정마다 일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옮기는 일과 작업이 완료된 고무를 파티션별로 나누어 저장소에 모으는 일을 했다.
말로만 직업의 귀천 의식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노동을 하고 싶었다. 젊을 때 막노동을 해본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각오는 되어 있었는데, 마음일 뿐 실제는 달랐다. 고무를 다발로 묶어 놓으니 그 무게가 상당했다. 생각과 몸은 따로 놀았다. 고무를 접착제로 이어 붙이고, 붙인 것을 확인하고 단추를 다는 작업 과정에는 여성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늙은 할배 풋내기가 여성들 작업장으로 들어오니 모두의 관심 대상이다. “무엇하다가 왔어요?” 하고 여기저기서 묻는 말에 “과거는 묻지 마세요. 그냥 살라꼬 합니다.” 라 답하면 모두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긴다. 고무 묶음을 옮기는 작업을 빌빌거리며 하고 있으면 나이 많은 여성 노동자가 와서 종이 드는 듯 가뿐히 옮겨 주고 간다. 고무 다발을 반동으로 어깨에 쉽게 들어 올린다. 그야말로 경험자가 선생이다. 여성 노동자는 동갑이라며 반갑다고 “예전에 무슨 일을 하다가 왔냐?”라며 이것저것 관심거리를 물어본다. 궁금해하는 물음에 답하며 고마움을 눈으로 표했다.
현장에는 새로운 노동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노동 분쟁을 차단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노동자들은 일용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신분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대표가 되어 회사 대표와 계약을 맺는 형태라 홀로 사업자이고 사장이다. 노동자의 명칭을 사장으로 부르는 현실이 사기 치는 사회같이 느껴졌다. 개인이 사용하는 모든 커피, 끈, 작업에 필요한 일부 용품마저도 개별 사업자인 노동자들 스스로 준비했다. 자신이 가져온 커피를 나에게 권하며 마시라고 하니 고마웠다. 나도 답례로 큰 봉투의 사탕이며 커피를 사서 나누고 함께 마셨다. 친구가 나의 이런 행위를 듣고 “임마, 니가 공장장이가!” 하는 힐책을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집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나와서 섬섬옥수 고운 손으로 거친 고무 작업을 하는 여성들이 안쓰럽고 고마웠다.
검사부는 나 같은 임시직이 땜빵 삼아 작업하거나 처음 오면 작업 지시를 받고 생짜배기로 일을 해 나가는 첫 부서이다. 늘 새로운 사람으로 작업반이 구성되기 때문에 똑같은 작업 내용을 반복 설명하며 일했다. 비효율적이다. 작업 편람을 만들면 반복 설명하는 낭비를 줄일 테고, 노동자도 쉽게 적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업 매뉴얼을 만들려고 B사장에게 “작업 과정의 일부를 촬영해도 되겠냐?”라고 하니 펄쩍 뛴다. 노동 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자료라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기야 내가 이 회사에 임시직으로 취업하기 전 사장이 나에게 다짐을 받은 것이 있다. 모든 노동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입사가 허락된 것이다.
20일 정도 지나 어느 날 사장이 불렀다. 다른 공장에 고임금 자리가 났는데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돈에 욕심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고령의 재활용품인 인간에게 고임금을 주겠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맡게 될 일은 고무에 펀치로 구멍을 내는 작업이라며 새로운 사장의 이름과 함께 알려 주었다. 우리 회사의 소규모 작업장에서도 하는 공정이다. 고무에 얼마나 정밀하게 구멍을 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너무 깊이 구멍을 내어 버리면 안 되고, 이중의 고무면 중 한 면만을 관통해야 하는 작업이다. 혼자서 옮기고 저장하고 차에 싣고, 펀치로 뚫는 일인데 잠시의 쉴 새도 없다. 이 작업을 중년의 여성 노동자가 혼자 도맡아 일하고 있었다.
J사장이 처음 면담을 할 때 나에게 물었다. “돈이 절박하냐?”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했다. 돈에 미쳐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대답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다. 다음 날 시내에서 남선생, B사장과 셋이서 술을 한잔하며 이야기가 이루어졌다. B사장이 내가 꽤 임금이 높은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말하자 남선생이 '나도 그런 자리 하나 구해 달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농담 삼아 “일에 경험이 있는 경력사원이라야 한다.”라고 하니 B사장이 크게 웃으며 맞는 말이라며 추임새를 넣어준다.
15일 후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로 하고 B사장의 공장에서 일을 이어갔다. “우리 공장에서 잠시 실습을 해보고 가면 수월할 텐데….”라고 B사장이 말한다.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하고 내심 기대를 했다. 하지만 사전 경험의 기회는 제공되지 않고, 그냥 잡부로서 시간이 흘러갔다. 새 공장으로 출근할 시간이 다가오자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펀치로 많은 제품을 불량으로 만들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혼자 남아 전전긍긍할 자신을 떠 올리니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금은 적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을 택하여 그림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5년 정도 그림 공부를 해 왔는데 인제 그만둬버리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출근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발목을 잡는 여러 가지 핑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 않으려면 핑계가 생각나고 어쨌든 하려고 하면 방법이 생각난다는 말처럼…. 출근 전날 B사장에게 전화하여 “일을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니 그도 황당해한다. “내일 당장 출근인데 지금에서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 비난의 말이 들리자, 수치심으로 온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B사장은 “그렇다고 만나지 않을 사람도 아니고!”라며 위안이 되는 말을 남기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B사장이 새로 일하게 될 곳의 사장과 잘 아는 사이이니 미리 이야기가 전달되리라 생각하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
저녁에 B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출근하지 않았냐?”라고 물어서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장님이 새 일터의 사장에게 말을 전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출근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라며 불같이 책망의 말을 하였다. '내일 내가 직접 일하기로 했던 곳의 사장에게 가서 이야기하겠다.'라고 연신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모멸감으로 온몸이 와들거렸다.
출근하기로 약속되었던 회사의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묻는다.
“생각해 보니 힘에 부쳐 자신감이 없어서 일을 못 하겠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라는 그의 말이 비아냥과 모멸의 의미로 느껴졌다. “이제 당신 같이 나이 많은 사람은 고용해서는 안 되겠군요. 돈이 절박한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신문에 광고를 내어도 급히 구할 수 없고 참 난감하네요!”라고 말한다. 어쨌든 내가 잘못한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B사장님에게 너무 심하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고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계속 미안함을 표시하고 나왔다.
모멸감, 수치심, 자괴감으로 순간순간이 처참하고 괴로웠다. 어째 살아가며 이런 낭패스러운 순간을 만들다니…. 이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경비를 하겠다고 이력서를 내놓았던 건물 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난번에 낸 이력서대로 일할 생각이 있으면 건물로 오라”고 했다. 임금은 적지만 그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근무 환경이었다. 작은 아이의 학자금 융자 받은 금액 2,500만 원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3년은 근무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출근했다. 근무시간에도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라 저임금도 감수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3년을 보내고 모든 수입과 관련된 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 생애 최악의 자괴감으로 괴롭던 순간도 시간이 흐르니 그 충격이 줄어든다. 땅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모멸감도 시간이 흐르니 잊힌다. 충격을 받은 그 참담한 순간에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충격을 되새기고 싶지가 않다. 미리 이야기했다면 그렇게까지 모멸스럽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을 안일하게 한 결과이다. 살아가며 그런 순간은 없어야 한다.
살아있는 우리에게 견디지 못할 만큼의 일들이 있을까? 견뎌내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렇다. 견디지 못할 만큼의 일은 없다. 죽을 것 같이 괴로운 순간도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훨씬 가벼워져 있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지금 숨을 쉬고 있으면 극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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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fWkrl90님 : 글을 읽고 나니 내게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언제인지 한참을 고민하게 하더군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한 회차를 살아온 것만으로도 나한테 장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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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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