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친구에게 당신은 무엇이 궁금한가? 나는 늘 “재밌냐?”라고 물어본다. 그만큼 ‘재미’는 돈, 성공 어느 것보다 내게 중요한 이유다. 재미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되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이어 나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재밌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감탄하고 과정 자체를 즐기며 살고 싶다. 재미있는 걸 찾을 때마다 샘솟는 내 안의 에너지를 밖으로도 꺼내, 비슷한 결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재미’를 너무 쉬이 여긴다. 야망과 대의에 비하면, ‘재미’는 소소하고 실없고 가볍다고 느낀다. 재미를 쫓는 사람은 현실은 모르고 이상을 꿈꾸는 몽상가쯤으로 여긴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채워 재밌게 살다 가고 싶다. 그래서 요즘에는 ‘재밌다’고 느끼는 순간을 모아서 기록하고 돌아본다. 락페스티벌 무대 위 즐겁게 취해서 노래하는 밴드들을 보며 덩달아 황홀해지던 날. 쉰내 나던 빵으로 실패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폭신폭신한 포카치아를 만들어 오븐에서 꺼낼 때. 누군가 스치듯 내게 한 칭찬을 꺼내어 자기 전까지 되새김질할 때.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발견하는 매 순간은 즐겁다. 이를 갈고 닦아 나가며 하루하루 나아지는 성취감을 만끽한다.
그러나 이 ‘재미’라는 게 내가 원해서인지 아니면 세상이 주입한 건지 혼란스러운 때가 있었다. 바로 취업과 이직의 시기였다. 취업 준비생 시절에는 시간을 늘 가치롭게 보내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유일한 가치는 ‘생산성’이었다. 당시에 나는 취업에 도움이 될 법한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는 내가 뿌듯하고 그 활동들이 힘들더라도 재밌다고 느꼈다. 산학협력 프로젝트, 공모전, 합숙캠프 등을 하며 나는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대학생활을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회사원도 아니면서 회사원 흉내 내기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취업하면서 원하는 걸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취업도 하고 ‘이제 생활이 뜻대로 흘러가겠지’ 하는데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 사회적 성취들이 내가 원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대다수가 그리 살아가듯, 학교를 가고 성실한 일꾼이 되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내가 원하도록 사회가 주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 똑바로 깊이 있게 바라봐야 했다.
그때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만났다. 스스로를 ‘잉여 인간’이라 부르는 네 명의 영화과 학생들이 자퇴를 하고 무일푼인 채 유럽으로 날아가 1년 동안 살아남는 도전을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유럽에 있는 한인 민박 업체들의 홍보영상을 만드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으며 유럽 생활을 이어가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을 딱하게 여겨 밥 한 끼 주는 민박집 주인들은 있어도 영상에 대한 수요는 없었다. 이들 중 영어를 제대로 하는 이는 없었고, 돈도 부족해 도시 이름만 종이에 대충 휘갈겨 나침반 하나만 들고서 히치하이킹으로 국경을 넘나다녔다. 막무가내로 걸어가겠다는 이들을 막아서는 지나가던 버스 기사, 또래 프랑스인 등 선의로 가득 찬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이동해 나갔다.
아무도 잉여들을 찾지 않자, 결국 한계에 부딪힌 이들은 바티칸이 보이는 쓰레기장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가다 “다 끝났다. 한국으로 돌아가자.”하며 포기한다. 모든 걸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물이나 가득 사 오던 길이었다. 그 순간 우연히 로마의 호스텔에서 연락이 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호스텔이 무엇인지 개념도 못 잡던 이들에게 영상 제작의 기회가 왔다. 모델도, 촬영도, 편집도 잉여들이 해낸 영상은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 적 없는 소개 영상이 되면서 입소문을 타 유럽 전역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영화 내내 이들의 저지르고 보는 패기는 대단했고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십일 년 전 영화인데도 마음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모든 걸 다 내려놓는 무모함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학교든 직장이든 항상 어딘가에 속해 그 소속감과 안정감에 기대었고, 내 이름과 몸만 가지고 홀로 서본 적이 거의 없다. 저들처럼 완전 야생으로 내던져져 ‘내가 어떤 걸 잘하고,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알면 좋겠다.’라는 부러움과 동시에 두려움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무모할지언정 재미있게 사는 젊은이들의 낭만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 역시도 재밌는 일을 찾아 헤매다, 두 곳의 인턴과 세 곳의 직장을 거쳐 지금의 회사로 왔다. 그 과정에서 내 나름의 결론은 ‘어느 조직이든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직장에서의 일은 1%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나머지 다수의 하기 싫은 일을 견뎌내는 일’이라는 말은 슬플 정도로 현실적이다. 직장에서의 성취나 경험으로 나를 설명하려 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래서 지금은 직장에서의 나를 구분하여 생각한다. 직장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이다. 그 안에서는 조직이 치열하게 돌아가도록 경쟁을 이겨내는 사람이 최고의 인재로 평가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짜놓은 판에서 자기 증명을 하려고 애쓰지 말자라며 되새긴다. 내가 내 판을 짜자.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나만의 재미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베이킹 클래스를 배워보고, 아버지로부터 사진을 배우고, 부모님 집을 고쳐보고,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며 일을 여럿 벌여본다. 대단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그 과정이 재밌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화의 가장 큰 에너지는 잉여력 넘치는 4인의 낭만이다. 십일 년 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니 네 명의 우정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우린 망했어.” 하며 바보같이 웃던 잉여 네 명이 점점 풍파에 퍼석퍼석해져 서로를 할퀴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같이 방랑의 세월을 함께 이겨내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친구가 되어간다. 마음 맞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인생은 살만하다. 넷이 낄낄거리며 ‘이거 영화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자신들조차도 의심하던 이 일 년 동안의 여정은 마침내 영화로 개봉했다. 그뿐만 아니라 개봉한 2013년 독립영화계에서 최단기간 관객 2만 명을 돌파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엔딩에서 ‘곧 다시 돌아오겠다’며 예고한 이 영화의 2편은 아직도 나오고 있지 않다. ‘잉여’라는 이름값 하며 그냥 쉽게 포기하고 ‘안 할래’ 하며 접은 걸까. 오랜만에 잉여 넷의 근황을 찾아보았다. 연출을 맡은 이호재 감독은 ‘서플러스(잉여)’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차리고 성공한 광고 감독이 되었다. 다른 세 명의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무 정보가 없다. 경쟁이 싫어 모든 걸 박차고 나와 자신들만의 판을 짜러 갔다가 화려하게 데뷔작을 터뜨린 이들이다. 영상예술계에 계속 몸을 담고 있든 아니든 지금 어느 판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 이 잉여들은 무모할지언정 또 다른 자신만의 재미를 찾아 도전하고 즐기면서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11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의 엔딩을 나는 이렇게 마무리 지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