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아버지와 두 딸의 글입니다. 2025.11.09. 서른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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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서른번째 이야기입니다!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주제는 🐝최근에 알게된 나의 새로운 모습은?입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나 가능성을 마주한 적이 있나요? 혹은 내가 알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든, 어떤 모습이든 좋습니다. 질문을 떠올리면서, 오늘 글도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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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by. 흔희)
“영성이 높다고 나오는데 혹시 종교가 있나요?”
“아니오. 저는 종교가 없어요.”
“영성이 높은 분 중에는 종교 생활을 성실히 하는 분들이 많던데. 그럼 흔희씨는 왜 영성이 높다고 검사지에 나온 걸까요?”
“최근에 환경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어서 그쪽에서 영향받았나. 사실, 잘 모르겠어요.”
24년 3월. 휴직을 하며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계획에 따라 10회 기의 상담을 신청하였다. 상담의 중반부쯤에 기질 성격유형 검사를 하였고, 상담가는 검사 결과를 분석해 주고 있었다.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딱히 하나의 신을 정해 섬기고 있지도 않다. 나에게 귀신과 신은 같은 의미다. 그런 나에게 영성이라니? 의아해하는 나에게 상담가는 한마디 덧보탰다.
“꼭 신을 믿는다고 영성이 높게 나오는 건 아니에요.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존재하잖아요. 그 흐름의 존재를 스치는 사람도 있고,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흔희씨는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겠죠.”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이 학생 지원센터에서 MBTI 검사를 받는 과제를 내주셨다. 지금처럼 MBTI가 상대방과의 첫 만남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 화젯거리이자 동시에 서로의 성향을 파악하는 사전 정보로 익숙해지기 전의 시절이었다. 그때 나의 MBTI는 ESTP였다. ESTP에 속하는 사람은 현실주의적인 실행가라고 불린다. 외향적이고(E) 감각적이며(S) 사고 중심적이고(T) 세상에 유연하게 반응하는(P) 성향이라는 것이다. 나에 대한 MBTI 결과를 해석하는 과제에서 나는 내 자신을 ‘이론보다는 현실에 반응하는 사람. 직접 몸으로 겪어가며 배우고 눈앞의 현실을 행동으로 바꾸는 사람'으로 요약하였다. 실제로 그랬다.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시시콜콜한 화제에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누군가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장점'을 화제로 던졌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그 질문에 동기들은 다들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 물음에 대해 나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나를 바꿀 수 있어.’라고 답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취직을 했고,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인생의 발달과업을 정신없이 수행해 가며 달려가던 시절이었다. 삼십 대의 끝자락에서. 동생은 생일 선물로 내가 글쓰기 모임에 나갈 수 있도록 회비를 결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워킹맘에게 부여되는 여러 가지 역할에 매몰되었던 상황에서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선물 받는 느낌이었다. 글쓰기 모임의 제목은 ‘MBTI와 함께하는 글쓰기'였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주최 측은 나에게 검사지를 보내왔고 거의 20년 만에 나는 다시 MBTI 검사를 해 보았다. 나의 성격 유형은 ENFP로 나왔다. 두 가지 요인이 바뀌어있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세상을 바라보며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S) 나는, 가능성과 과정에 집중하며 의미에 보다 방점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N)이 되어 있었고, 논리(T)보다 감정과 가치(F)를 마음에 담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20대의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의지'였다. 세상도, 나도 내 의지대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좌절도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원인을 돌렸고, 의지와 끈기로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퍼부은 노력을 산출물로 잇기 위해 바쁘게 달려갔고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나에게 운명은 개척하고 조정하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받은 검사 결과에서도, 그 무렵에 병행했던 상담의 성격 기질 유형 검사에서도 내가 모르던 내가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바람을 타는 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고 겪고 감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한 인간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 의지만으로 삶을 채울 수 없다는 것. 봄-여름-가을-겨울마다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그것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지만 그렇다고 가는 봄을, 오는 겨울을 거스를 순 없다.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부정하던 내가 이제는 ‘순리'라는 말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 것이다. 삶의 굵직한 순간마다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을 부여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20대의 나에게 40세가 된 나는 ‘그럴 수도 있다'라는 여유를 채워주고 있다. 삶을 어떻게 다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흐름이라는 것도 존재하며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예상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을. 통제될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의미는 존재하기 마련이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의미를 채굴하고 배워간다. 내가 삶을 이끌어 가기도 하지만 삶이 나를 이끌어가기도 한다. 인생을 사계절로 친다면 나는 지금 어느 계절에 와 있는 걸까?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아가면서 영글어 가는 과정 중의 어디쯤일까. 다음 주부터는 기온이 훅 떨어진다고 한다. 벌어지는 아침과 밤의 기온차만큼 가을이 깊어 간다. 나의 계절도 그렇게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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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도 리허설이 필요하다 (by. 아난)
“아니다. 다시다시.”
빨강 신호등이 켜질 때면 차 안에서 핸들을 부여잡고 중얼중얼 소리 내 말한다. 멀리서 보면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연습하는 건지, 아니면 낯선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싸움 리허설 중이다. 싸우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리 내 말한다. 말하다 보면 토해내고 싶은 감정과 상대에게 내 상황을 이해시키고 싶은 마음에 말이 자꾸만 길어진다. 무엇 하나도 전달될 리가 없다. ‘이게 아닌데’ 하며 한숨과 함께 입을 닫자, 차 안에는 깜빡이 소리만 덩그러니 들린다. 깜빡이 소리를 듣자 번뜩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였지?‘로 돌아간다. 다 걷어내고 한 문장으로 줄여본다.
올해는 유독 갈등이 이리저리 많았다. 서른이 넘어서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면 ‘맞지 않는구나‘ 하며 흘려보낼 뿐이었다. 갈등이 크게 일어날 일조차도, 싸울만한 관계도 다양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관계는 좁혀졌다. 그런데 올해는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친구와도 여러 갈등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당연한 건 세상에 없구나.’ 라는 걸 느꼈다. 내게는 당연한 걸 힘들여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게 세상 피곤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 해서라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이었기에 많은 공을 들이며 갈등을 지나왔다.
대부분의 싸움은 나의 높은 기대치가 문제였다. 직장동료도, 배우자도, 친구도 ‘너는 뭘 이렇게까지 하냐?’라며 반응했고, 나의 기대치가 좌절되었을 때 서운함이 가득 차면서 상처 주는 말을 꺼내곤 했다. 처음에는 상대가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싸우면 싸울수록 ’아!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이 사람은 정말 노력하고 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깨닫는 게 아니라, 싸움을 끝까지 끌고 가 서로의 밑바닥을 내비치는 순간, 상대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지난 일들까지 등판하여 서로의 서운함을 토로할 때면 무한히 커지는 거대한 벽이 세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겪은 일이지만 기억하는 내용도, 온도도 다름에 또 한 번 간극을 느꼈다. 이 또한 나만큼 상대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던 높은 기대치가 문제였다.
큰 소리를 낼 때면, 소리치는 현실의 나와 ’어? 이게 아닌데?’하며 머리 속의 내가 분리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래도 너와 잘 지내고 싶다.’인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이게 이해가 안 돼?’라는 날 선 말이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어. 내 처지를 이해해 줘.’만 서로 외칠 뿐 서운함에 휩싸여 듣지 않는 대화가 반복되었다. 승자도 없고, 속이야기를 쏟아내는 개운함도 없는, 서로를 찌르기만 하는 갈등이었다.
거친 갈등을 관통해 나갈수록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리치고 분노하고 나면 냉랭해지는 그 과정에서 간장 종지만 한 내 그릇이 들키는듯하여 부끄러웠다. 지난 갈등에서 패착이 되었던 거친 말들을 주워 담아 오답 노트를 적듯 복기했다. 상대가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 때 무시하며 외면했던 타이밍을 되돌아보며 ‘못났다. 그때 어떻게 했어야 갈등이 사그라졌을까?’를 고민했다. ‘무엇이 싸움을 반복하는 걸까?’ 어디에서 우리가 긁힌 건지 패턴을 알고서, 패턴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서 가져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의 싸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서 했던 말을 곱씹고 그 상처를 들춰 봐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칠수록 진이 빠졌다. 더더욱이 싸움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졌다.
생각이 정리되고 나면 내 허물을 들추어 보여줘도 되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얻는다. 싸움의 소용돌이에 있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 날 선 말과 논점을 흐리게 할만한 불필요한 말들을 덜어내 준다. 상대의 예상되는 반응이나 조심해야 할 부분을 신선한 관점에서 얻을 수 있다. 다시 한번 생각과 말을 정리하고 고치고 다듬는다. 이 갈등의 서두와 결론에 ’나는 여전히 당신을 지지하고 좋아하고 이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한다. 이쯤 되면 ‘뭘 이렇게까지 싸움에 열심이냐?’라며 스스로에게 질린다. 생각하고 가서 그냥 상대방과 말하면 되지 이걸 무슨 이렇게까지 하냐 싶지만 나는 싸움에 서툴다. 이번에도 원하는 말을 전달하지 못하면 또 싸우게 될 것이기에 마음이 절로 비장해진다. 내게는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고 언쟁할지언정, 갈등 끝에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양질의 대화에 대한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올해 들어 여러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던 내 안의 미약한 부분이었다.
자. 이제 대사는 모두 준비되었다. 상대의 시야에서 말하는 나를 바라보며 우리의 싸움을 상상해 본다. 운전대 앞에서 정리된 말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또박또박 눈을 보며 이어 나가야 한다는 걸 되새긴다. 마침내 상대에게 다가가 ”우리 대화를 좀 할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습했던 대로 나오는 내 목소리는 익숙하고 안정적이고 단호하다. 그러나 이후 상대방의 말과 표정에 무너지는 나는 가까스로 정신줄을 부여잡으려 애쓴다. 내가 원했던 침착하고 우아한 대화는 이미 물 건너간 뒤다. 아무리 이성의 끈으로 싸움을 동여매고 부드럽게 가려고 해도 화가 터져 나오고야 만다. 모순되게도 나의 무너짐에서 상대가 내게 손을 내민다. 준비해 간 말들은 도움닫기일 뿐, 뒤이어 나오는 감정선까지 모두 토해내고 나야 갈등은 진정국면에 접어든다. 서로의 분노가 걷히고 나면 ’뭘 이렇게까지 고민했었냐?’라고 노력에 감동하며 관계는 다시 순항한다.
‘뭘 이렇게까지 하냐?’로 시작한 싸움은 같은 말로 함께 마무리된다. ‘높은 기대치’는 상대에게 바라는게 많은 나의 미약함이면서, 그 기대치는 스스로도 옥죄어 뭐든 끝까지 열심히 가게하는 강인함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 깨달았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아닌, 있는 그대로 나의 가장 뚜렷한 색깔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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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몰랐던 면(by. 못골)
나는 재능이란 말보다 노력을 믿는 경향이다. “재능이 있으니 혹은 재능이 없으니”라는 말로 사람들이 자주 자신의 하지 못함을 합리화한다. 우리는 모두 유명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잘하는구나,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글을 잘 쓰는구나 하는 ‘잘 한다’ 정도로 우리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 ‘잘 한다’라는 수준에도 이르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은 누구든 도달할 수 있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끈기의 문제이다. 재능이란 말을 노력하지 않는 자신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자세를 싫어한다.
제도권 교육을 오랫동안 받았으면서도 특히 미술, 음악 부문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하고 반문해 본다. 나는 정말로 예능에 소질이 없을까? 모른다. 배워보고 판단하자. 2015년 퇴직을 하고 건물 경비를 3년 동안 했다. 그때 대금, 기타 등 악기를 잘 다루는 친구가 찾아와서 하모니카를 배워보라고 했다. 친구는 내게 하모니카를, 나는 그림을 가르쳐주며 시작했지만 끝내 흐지부지되었다. 고수들은 공백기를 거쳐도 다시 짧은 연습을 하면 그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지만 초보는 쉬면 그때부터 바닥으로 바로 떨어져 버린다.
그렇게 10년 정도의 세월이 또 흘러갔다. 2024년 봄에 그 친구가 다시 ‘하모니카를 배워보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노인복지회관에서 하모니카 강의를 듣고 있는데 이 몸 생각이 나더라고 한다. ‘그래 한번 배워볼게!’ 하고 쉽게 동의했다. 내 또래의 할배 할매들이 모여서 하모니카를 처음부터 배운다. 스케일, 숫자악보, 기본적인 악보 부호의 이해 그리고 수준에 맞는 쉬운 동요를 연습곡으로 부른다.
그러나 박자가 문제였다. 박자 개념이 없으므로 어떻게 하면 박자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지 유튜브로, 친구에게, 처에게, 아이들에게 온갖 곳에 물어보아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음악 이론은 5분이면 이해되는데 그것을 체화하기는 1년이 지나도 안 된다. 강사는 1년 정도 하모니카를 배우면 능력이 달라진다고 한다. 일 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박자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그때 닥칠 좌절감이 떠올랐다. 겁났다.
그마저도 일단 해보고 판단하자. 그래서 노인학당과 구청 평생 학습장 두 곳을 다니며 수업을 들었다. 친구에게 박자를 물으면 그도 답답한지 지휘법으로, 문자로, 그림으로 박자를 설명하지만, 이해는 되어도 노래에 적용은 되지 않는다. 메트로놈을 켜고 연주하면 쉽게 박자 개념을 익힐 수 있다고 하여 메트로놈을 켜고 해보니 3박자째인지 4박자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노래를 내려받아 따라 불렀다. 초급반 강의를 4번 정도 반복해 들었다. 1년이 지나도 박자 개념이 정립되지 않는다.
그래도 처음 불렀던 노래들을 연주하기가 훨씬 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의 실력은 향상되었나 보다.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박자 개념도 정립이 되겠지' 하고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1년이 지났으니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훨씬 전에 포기하였을 것이다. 1년 넘게 계속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하모니카에 일정 정도 적응되어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하면 구청에서 지원도 해주고 조금 나은 수준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동아리에 가입했다. 남자라는 이유로 강사 선생님이 나보고 회장을 하라고 한다. 공부 못하는 반장이지만 동아리를 맡아서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것으로 나름 기준을 정했다. 힘들다는 말, 그만두겠다는 말, 자기 자랑 안 하기,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힘들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공문서 작성, 연습일 기기 사용, 강사 대우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찾아서 하고 중요한 일은 함께 논의하니 모두 만족해하며 동아리 활동에 참여적이다. 동아리 활동에 만족도가 높아지니 회원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강사비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 10명이 회원이 되어야 1달에 2번의 강의가 가능하다. 13명으로 회원이 늘고 구청에서 여러 가지 재정적 지원을 받으니 어느 정도 동아리 재정의 여유도 생긴다.
10월은 문화의 달이다. 구청에서 지원하는 동아리 간 공연 축제를 하는데 하모니카 동아리도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일단 신청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열심히 연습하니 구청의 담당 실무자도 좋게 보고 격려를 팍팍 해준다. 수요일 정기 수업일 이외에도 공원 빈터에서 연습을 계속했다. 무슨 공연이든지 연습만이 해결책이다. 노래는 아예 문외한이고 이런 활동으로 무대에 서보는 것이 일생에 처음이다. 공연에 최선을 다하자며 연습일 간격을 점점 더 짧게 잡아 나갔다. 한 주에 4번씩 만나 연습을 계속하며 박자와 음정을 맞추고 친목도 올렸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 후 MR을 틀었는데 도저히 따라서 연주할 수가 없다. 아예 어느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연일이 일주일 남은 날, 선생님이 각자 앞에 나와서 혼자 반주에 맞춰 연주해 보라고 한다. 반주를 아예 알아들을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하다. ‘나의 수준이 이제 드러나는구나!’ 하고 자책한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반주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하모니카를 함께 불기 때문에 반주에 맞추어 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반주를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니 선생님은 황당해한다. 그래도 일단 반주기에 맞추어 혼자 연주해 보라고 하지만 불가능해 선생님이 불러준 노래에 맞추어 연주했다. 황당해하는 선생님의 표정 속에 함께 연주 연습을 하고 수업을 마쳤다. 나 혼자만 반주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도 부끄럽고, 황당하였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반주가 나오면 노래의 어느 부분이 연주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니 기타 연주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뭐지? 음악을 모르는 나는 당연하지만, 음악을 그것도 피아노도 치고 댄스도 하는 아내가 모른다고 하면 동아리 회원들이 모두 모른다는 말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체했다고! 나만 모르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회원들에게 물어보니 나의 짐작이 맞았다. 그들도 연주되는 구간이 어딘지 모른다고 했다. 어느 부분을 연주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박자가 맞지 않을 때 고칠 수 있다. 어떻게 문제를 풀지? 그렇다! 반주를 크게 하고 노래를 약하게 더빙하여 계속 들으면 반주의 연주 구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께 파일 제작을 부탁드렸더니 만들어주셨다. 원하는 대로의 녹음파일이다. 연습할 때 동아리 회원들에게 파일의 유용성에 관해 물어보니 모두 정말 고마워한다. 모두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놀라운 변화가 있다. 악보의 박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각적으로 2분음표부터 인식이 된다. 2분음표의 길이, 4분음표, 반 박자를 노래 ‘모란 동백’에 적용하니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아! 박자는 이렇게 인식해 가는 것이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다. 갑자기 이런 인식이 되는 것은 모국어를 깨우치는 유아와 같은 과정이다. 반복하여 듣고 이해하려는 뇌 작용과 무수한 시행착오의 결과로 인식되는 과정이 오는 것이다.
견디면 적응되고, 적응되면 극복되는 것이다. 소소한 박자 문제에 1년 반 노력을 쏟은 결과이다. 노래 ‘모란 동백’을 따라 부르면 노래와 박자가 잘 맞아떨어진다. 그래도 하모니카로 불면 차이가 발생한다. 연습으로 그 틈을 메울 수밖에 없다.
악보가 시각적으로 보인다. 놀라운 경험이다. 당구에 미치면 밥그릇이 당구공으로 보인다고 하더니 밤늦게 잠이 오지 않아 누워 뒤척거리니 벽시계 소리가 박자음으로 들린다. 뭐든지 미쳐야 해결되는가 보다. 구청 공연을 박수 속에 마치고 다음 공연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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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님 : 자기 삶에서 꺼내기 쉽지 않은 후회되는 순간들을 용기 있게 공유해주셔서, 저도 제 과거를 돌아보며 많이 찔리고 생각하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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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궁금한 것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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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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