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아버지와 두 딸의 글입니다. 2025.12.23. 서른한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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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째 주제 - 어떻게 하면 멋지게 나이들 수 있을까? (글쓴이 : 못골👨🏻🎨)
노란 은행잎이 어느 날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날.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하는 날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는 나름의 만족감을 느끼며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미리 언급해 봄으로써 우리들은 삶을 좀 더 보람차게 만들려 할 것이기에 이 주제를 정했다. 모두들 멋지게 나이들고 싶어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이들수록 더 멋스러워지는 사람이 간혹있다. 정신적 의미이다. 준비하며 사는 삶에는 낭비가 없다. 생소한 분야에서 노력하여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경험한 결과를 베풀어 즐거워하는 사람이 멋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 보자는 의미에서 이번 호 주제를 정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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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냄비를 끌어안고 산다.(by. 흔희)
12월. 기말고사와 함께 진도를 모두 나갔다. 방학까지 아직 한 달 정도가 남아 요즘은 수업 시간에 그림책으로 수업한다. 소개했던 그림책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아나톨의 작은 냄비'이다. 주인공 아나톨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냄비를 달고 다닌다. 아나톨은 사랑도 많고 그림도 잘 그리며 상냥한 아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아나톨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냄비에만 시선을 둔다. 사람들과 생활하는데 냄비는 아나톨에게 걸림돌이 되고 시끄러운 냄비 때문에 자주 혼난다. 상냥했던 아나톨은 사람들의 비난에 소리를 지르고 나쁜 말로 되돌려준다. 그리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톨은 어떤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녀도 주머니에 냄비를 가지고 있다. 아주머니는 아나톨에게 냄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아나톨이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려준다. 아나톨은 다시 명랑한 아이가 된다. 아주머니는 작별 선물로 아나톨에게 냄비를 넣어다닐 가방을 선물한다. 냄비를 가방에 넣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아나톨은 더이상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고 냄비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는다. 아나톨은 이제 친구들과도 마음껏 뛰어놀고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두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 낼 줄도 안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사람들도 아나톨을 많이 칭찬해 주어요. 하지만... 아나톨은 예전과 똑같은 아나톨이랍니다."
인간 진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이 지금과 같이 대규모 집단에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던 생활에서 산업화 이후의 시대로 넘어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0시간의 비행으로 지구의 반대쪽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대 속에서 세계는 점점 연결되며 넓어지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며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일들을 하는 것에서 더 안정감을 느낀다. 물리적인 세계가 넓어지는 속도에 비해 인간이 인지하는 세계의 영역은 아직 좁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넓어지는 세계 속에서 보잘것없는 개인을 확인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개인이 개인 그 자체로 서지 못하고 공동체에 가려지며 공동체가 부여하는 이미지가 내가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공동체 속에서의 내가 분절되고 그 속에서 좌절감과 불안은 커진다.
뉴스를 보다 보면 이 사회에 혐오가 만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대와 성별 등을 이유로 사람들은 갈라지며 서로 선을 긋고 구역을 나눈다. 그리고 선 너머의 사람들을 낮추어 부르고 조롱한다. '메갈, 한남, 급식충, 영포티, 틀딱'. 아무리 언어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말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요즘 생기는 신조어들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더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이민자들을 쫓아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계의 곳곳에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난다. 사건의 크고 작음은 있겠지만 나는 그 사건들이 다 불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커지는 세계 속에서 마주하는 개인의 하찮음.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공동체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들이 모여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외부에 가장 약하고 만만한 존재들에게 표출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어른은 아나톨에게 냄비를 담을 수 있는 가방을 선물해 주던 아주머니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내 안의 어떤 허접한 부분이 내 삶을 피로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냄비를 끊어내고 버릴 수도 없다.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냄비조차도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냄비를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라도 수면 밑에서는 물에 뜨기 위해 끊임없이 발을 굴리는 백조가 우리네의 모습이라는 것. 세월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그것이 개인의 특수함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임을 알 것이다. 미리 겪어봐서 그려놓은 인생의 지도는 세상을 보는 여유를 만들어낸다. 내 하찮음을 목격해서, 공동체에서 배척당할까 봐. 또는 존재감 없이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조차 없이 점멸해 버릴까 봐 몰려드는 불안에서 그들은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생각할 여유를 가진다. 불안이 뜬금없는 대상에게 튀어나오지 않도록 순간을 조절하고 행동한다.
각자의 현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봐 주고 힘을 실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들은 냄비에 가는 시선을 거두고 사람에게 집중하는 힘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실패를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사람. 실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관점을 돌려주는 사람. 필요할 때 지혜를 건네 줄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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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 (by. 아난)
어른 한 명도 지나기 힘든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를 지나니, 양쪽 벽면 가득 해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게 진짜 사람의 유해라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곳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있는 ‘카타콤베‘라는 지하도시이자 무덤이었다. 종교 박해를 피해 조성된 이 지하 도시에 1,000구가 넘는 미라가 있다는 가이드의 말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는 소녀 미라를 마주했다. 스페인 독감 시대에 하늘나라로 간 2살 소녀이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마치 그냥 자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그녀를 보며 나는 마치 내가 스페인 독감에라도 걸린 듯 아파져 왔고, 그 시대를 상상해 보며 지하 예배당에서는 성직자가 되었다가 지하도시 시민이 되었다가 ‘죽음이란 뭘까’ 고민하며 탄성을 멈추지 못했다. 걸어가는 내내 놀라기 바쁜 내게 은정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가이드 투어가 필수인 곳이라 맺어진 한국인 무리에는 20대 후반쯤에 퇴사하고 유럽 여행을 오는 이들이 많았다. 은정 언니도 한국에서 들으면 다들 알법한 의류 브랜드의 디자이너였지만 퇴사를 기념하여 이탈리아 여행을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타콤베를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말했다. “어렸을 때 와서 좋겠다. 나이 들어서 오니 별 재미가 없어.”라고.
이후로 여행에서 왜인지 모르게 내가 뜨뜻미지근해질 때마다 은정 언니가 떠올랐다. 이제 나는 그때의 은정 언니보다 10살쯤은 많은 나이가 되었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어느 여행지에서는 ‘자 다음 구시가지. 자 다음 성당’ 할 정도로 그녀처럼 심드렁해졌다. 그럴 때면 은정 언니가 ’거봐. 내 말이 맞지?‘하며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이래서 뭐든 어렸을 때 많이 하라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나이 들수록 크게 즐거울 일도, 슬플 일도 없이 덤덤해진다는 말의 범위 안에 나도 들어가게 된 듯했다.
목구멍 보이게 웃길 좋아하는 나는 나이 들수록 일터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일희일비하지 마!’’라는 말을 듣는 날이 많아졌다. 카타콤베에서 ’우와’하며 입 벌리던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내 나이를 계산조차 하기 귀찮아지는 나이가 되니 얼른 어른인 척하며 본 모습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연함과 성숙함이야말로 내가 갖추어야 할 어른의 미덕이었다. MZ세대, 영포티처럼 세대와 나이마다 ‘이렇다,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유독 많은 우리나라다. ‘20대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같은 자기 계발 콘텐츠가 나이를 걸고 굳이 제목을 짓는 것도 잔인하다. 감정적이지 않고 진중한 어른이 되기에 지금 나는 한껏 부족한 것 같은데, 잘 나이 들기 위해서 지금 내가 뭘 놓치고 있나? 하는 불안감이 건드려지곤 한다.
그러다 2년 전, 남편과 스위스를 기차로 여행 중이었다. 백발의 미국인 노부부가 우리에게 기차 객실 내에 캐리어 두는 위치를 친절히 알려주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란히 마주 보는 4인 좌석에 함께 탑승했다. 인자함과 여유가 묻어나는 거구의 할아버지는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대부분의 대화를 주도하였지만, 옆에 앉은 할머니는 수줍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조용조용해 보이던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스튜디오 드래곤 알아요? 거기 작품은 내가 다 알아요.”
외국인이 한국 드라마나 배우를 물어보는 경우는 있어도 드라마 제작사를 알다니. 할아버지는 앱이 분석하기를, 그녀가 1주일에 20시간도 넘게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했다. 수줍어 보이는 할머니의 첫인상과 달리 눈에서 반짝반짝함이 느껴졌다. 드라마와 2년 후 계획 중인 한국 여행을 이야기하며 부부는 한껏 질문을 걸어왔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는 내게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며 자신의 이름 ‘데보라‘가 함께 적힌 블로그 명함을 주었다. 어떤 회사나 직책과 관계된 명함이 아니라 자신의 블로그 명함이라니! 회사가 파주는 명함만 받아오던 내 세계에서 스스로 만든 블로그 명함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는 백발의 데보라가 신선했다. 스위스가 처음인 우리를 위해서, 매년 여름을 스위스에서 보낸다는 부부는 휴대폰 속 갤러리를 열어 자신들만의 명소를 보여주었다. 스위스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데보라였는데도 "갈 때마다 매번 다르고 아름다워. 꼭 가봐"라고 신신당부하며 만남을 마무리했다.
명함을 받아 들고 들어간 블로그에는 그녀의 잘 보낸 하루들이 단단히 기록되어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여러 장의 사진과 일기처럼 이어진 긴 글 속에는 데보라의 일희일비가 담겨있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생긴 호기심에 김치와 연잎밥 만들기를 하러 가는 모험과 좋아하는 레스토랑이 문을 닫아 마지막 식사를 기록하는 슬픔이 그녀의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었다. 스위스가 초행길인 여행자들이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도록 기차역과 버스 정류장 곳곳의 표지판과 정보를 발길 따라 담아놓는 섬세한 친절도 녹아 있었다. 남편과 한참을 백발의 미국인 부부 이야기를 하며 저렇게 살면 나이 드는 게 기대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갈 일들도 더 크게 다채롭게 느끼며 하루를 꾸준히 기록해 나가는 그녀를 보니 희끗한 머리와 주름이 더욱 여유롭고 자유로워 보였다. 나이 들수록 별 감흥 없다고 되뇌던 은정 언니는 서른도 넘지 않았지만, 백발의 데보라보다 더 나이 든 사람 같았다. 데보라와 은정 언니 중 누가 젊고 누가 늙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제 나이에 맞게 산다는 게 멋지게 나이 든다는 걸까?
어느새 여행을 갈 때 이제 은정 언니보다 스위스에서 만난 데보라가 더 강렬하게 떠오른다. 나이 들어갈수록 즐거울 일도 재밌을 일도 덜 해진다는 은정 언니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아닌데!’라고 당차게 외친다. 소소한 일에서 의미를 더 찾고 감정의 진폭을 만끽하려 더 표현한다. 남편이 사 온 크리스마스 식물 화병에 코를 파묻으며 행복해하고, 회사에서 내가 기획한 이벤트가 실패했을 때도 이마를 팍 치며 ‘완전 망했다!‘라고 한껏 후회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데보라처럼 블로그에 기록하고 일기로 남겨둔다. 그렇게 나는 ‘일희일비하지 마!’’라는 말을 걷어차고, 나이 들어가는 것이 무색하게 오히려 주변에 소소한 일들에도 주파수를 더 촘촘히 세우려 한다. 나이에 나를 구겨 넣기보다 자유롭게 내가 해보고 싶은 것 혹은 하기 싫어 진절머리 나는 일이어도 이 기회에 알았음에 감사하고 하나씩 해나가 본다. 이렇게 쌓인 하루들이 모여 멋진 주름과 여유가 밴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까지 멋진 어른이 되지 않더라도 가끔 잘 보낸 하루들이 쌓여갈 테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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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따라 더해지는 것의 아름다움(by. 못골)
“나이가 한참 되면 여성, 남성의 구분이 없어지고 남자는 여자가 된다”라고 친구가 익살스레 말한다. 여자가 거의 전부인 모임에서 나도 편하게 여자처럼 호칭을 부른다. 오빠, 언니, 큰언니 이런 호칭을 사용하면 모두 웃는다. 그러면서 격의 없이 더 친해진다.
평생학습관 나이 든 동아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언니가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언제 죽어도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라며 삶을 초탈해 버린 듯한 언니의 말에 나는 감전된 듯 ‘아!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하며 존경스레 바라보았다. 삶에 미련이 없다는 말은 이제 모든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으니 두려움 없이 산다는 말이었다.
만난 지 일 년이 넘어가니 언니와 뼈 있는 농담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녀도 알고, 그 노래가 나오면 그녀도 반가워한다. 감성을 공유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틈만 나면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어느 날은 불평을 한마디 한다. “맨날 촬영하더니만 사진은 한 장도 안 주네!” 안 그런 것 같아도 모두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늘 써 금한(’낡고 허름한’을 뜻하는 부산 사투리) 사진기를 휴대하여 시도 때도 없이 촬영해 대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실내 사진에다가 감도가 매우 낮은 사진기이니 후보정이 안 된다. 그래서 광선이 좋은 야외 거리공연이나 공원에 나가서 학습할 기회가 있으면 촬영하려 마음을 잡고 있다.
노인들을 찍는 사진은 조심스럽다. 특히 연로한 여성들은 나이 듦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자신에 대한 기대감도 있어서 촬영자 마음에 만족스럽다고 하여도 사진을 함부로 건네기는 더 어렵다. 그 언니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하며 미안해한다. “참 어렵네!” 하며 몹시 주저하더니 손전화를 보여주며 말한다. “내 젊을 때 사진인데 이 사진을 그림으로 한 장 그려 줄 수 있느냐?”라고 한다. 벽에 걸린 액자 속의 사진을 손전화로 촬영하여 기울고 왜곡된 사진이다. “영정 그림으로 사용하려는데 가능하겠느냐?”라고 물어서 “한번 그려는 보겠지만 내가 촬영한 지금의 사진이 더 이쁘지 않아요?” 하는 농담을 건넨다.
젊을 때 얼굴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자기 얼굴이 아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보니 모르는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아주 젊을 때 얼굴은 내가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다. “언니! 지금 모습이 가장 좋은 얼굴입니다. 지금 얼굴로 가장 이쁘게 촬영하여 그리는 것이 더 의미 있다!”라고 하니 그녀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주신 사진은 집에 가서 한번 가능한지 작업해 보겠다.”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손전화로 보내준 사진을 포토샵으로 살려보려 작업하고 보니 엉망인 사진이 된다.
젊을 때 우리들의 모습은 바람처럼 스쳐 사라져 버린 신기루 같은 날들의 모습이다.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것이 나의 얼굴일 수가 없다. 지나간 사진으로 그림을 그리기는 왠지 싫다. 특히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일수록 옛날 사진을 그리기가 싫다. 거짓말하는 느낌이다. 멋지게 나이 든다는 현재 시점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 규정하는 내용이 모두 다르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나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고 희망하며 노력하는 중이라면, 그 사람이 충분히 멋있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선배이고 벗이며 동료인 ㄷ형이 있다. 함께 졸업하고 여태까지 계속 만나고 안부를 전하며 지내왔으니, 평생을 함께하고 있다. 직장에서 해왔던 활동이나 퇴직 후에 하는 일들에서 나와 공유되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내가 그를 따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면모를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인지는 구분되지 않지만 친하게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은 나이 듦과 관계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격적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가 형수와 함께 손녀의 노령 육아를 위해 서울에 일 년 가 있을 때나, 육아를 마치고 돌아와서나 그는 늘 인문학 강의를 끊임없이 들으며 자신의 궁금한 부분을 채우려 노력한다. 그에 대한 아내의 평을 들으면 대화를 나누면 품어 나오는 분위기, 상대방에 대한 존중, 현실에 대한 바른 판단과 삶의 무게가 중후하게 느껴져 존경심이 자연스레 인다고 한다. 그 형에게 아내는 드물게 후한 점수를 준다.
대학 기획실에 직원으로 오래 근무한 친구가 중년의 나이가 드니 행정 직원이었는데도 교수 느낌이 품어 나왔다.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그의 면모가 그곳에 맞게 갖추어진다. 맹모삼천은 어린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과정에 적용되는 언제나 당연한 진리이다. 근묵자흑, 초록동색, 맹모삼천과 같은 말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모두 비슷하다. 환경적 요인으로 자연스레 품어 나오는 분위기는 노력하여 만들어진 그 사람의 내면적 참모습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교양은 언어를 통해서 드러난다. 평생학습관 동아리에 모인 10명 남짓한 사람들은 자라온 환경이나 가정 상황, 건강, 경제 능력, 직업, 학력 등에 대해서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1년쯤 매주 만나니 서서히 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부처님도 뒤로 돌아가면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것이 보일 때쯤이면 정말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만남이 이어질 수 있도록 처신한다.
평생학습관 동아리에서 53살 막내 여동생이 암 투병으로 몹시 고생스러워한다. 소탈한 이과 남학생처럼 행동하는 낙천적 자세가 돋보이는 사람이다. 모든 것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회원 모두의 관심을 끈다. ‘남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요즘은 사람이 좋아지면 그려야 한다. 그리기 위해서 촬영해 둔다.
병문안을 갔다 오고 허탈한 마음에 부산 시민공원에 낙엽 지는 나무 사이를 혼자 걸어본다. 시민 공원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있는 키 큰 서양 미루나무 세 그루가 있다. 그 나무를 찾아서 한 컷을 했다. 다른 풍경에 비해 키가 커서 눈에 두드러져 외로워 보이는 나무, 시골 비포장도로를 따라 드문드문 길게 서서 그리운 길을 장식해 주던 나무는 오래된 기억과 함께 나타나는 보고 싶은 나무이다. 수평적인 풍광을 거부하며 수직으로 서 있는 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팔랑거리며 반짝거리는 잎들, 비포장도로의 뿌연 먼지 속에 떠오르는 그 나무를 보면 반가운 친구 같다. 아주 멀리서 이주해 온 듯한 그 미루나무는 시민 공원 내 어디에서 보아도 찾아갈 수가 있다. 11월 미루나무는 노란 잎을 달더니 붉은 아름다운 잎으로 물들어 쉼 없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모습이다. 우리도 내면을 더욱 알차게 하여 나이가 더해갈수록 아름다움이 품어 나오는 분위기를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멋있게 늙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노인석에 아이를 데리고 외국인 젊은 부부가 앉아 있다. 전철이 서고 늙은이가 타니 세 가족이 일어서서 자리를 내준다. 그래도 빈자리가 있어 3살 정도의 여아에게 앉아도 된다고 몸짓으로 이야기하니 아이가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안 앉겠다고 고개를 젓는다. 외국 어린이의 눈에도 할배는 싫은 모양이다. 노인이 싫은 것은 만국 공용이다. 그런 존재이면서도 남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는 ㄷ형이 생각났다.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푸른 하늘, 푸른 산을 배경으로 위로 위로 치솟아 올라가는 미루나무의 기상처럼 싱싱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ㄷ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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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읽으면서 머리를 스친 어떤 의견이든, 궁금한 것이든 편하게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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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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